빨지산의 역사   남부군...한국전쟁   지리산과 빨지산  지울 수 없는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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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빨지산

국내에서 빨지산의 활동의 시작은 일제 말기 징병·징용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적은 규모이며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외에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많은 규모의 항일빨치산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조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을 뿐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전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내륙의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 되었다. 10월 19일 제주도 파병과 군내 좌익제거인 숙군에 반대하여 일어난 여수 주둔 제14연대 병사들의 봉기는 신생 대한민국 체제에 위협이 되었다. 당시 신무기였던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한 반란군은 정부의 진압군이 여순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인근의 지리산·백운산 등지로 들어갔다.

 

  산으로 들어간 이들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전부터 도피해있던 남로당 빨치산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조직적인 훈련과 새로운 무기를 갖춘 봉기군의 합류는 미미한 수준의 빨치산에게 흡사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격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은 철수계획을 연기하였고, 정부는 경찰이 아닌 군을 동원하는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빨치산의 지도자는 여순봉기를 지휘했던 제14연대 중대장 출신의 김지회·홍순석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군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토벌작전의 결과 구빨치(한국전쟁전의 빨치산)가 거의 와해되어 갈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 초기 부산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지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은 남한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치를 하였다.  과거 빨치산과 인민위원회 출신 세력과 북한에서 파견된 간부들이 인민위원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로 북한의 인민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퇴로가 막힌 북한의 정규군, 인민위원회 주도세력, 우익세력의 보복이 두려웠던 사람들이 다시 산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기의 빨치산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빨치산(신빨치)은 이전의 빨치산(구빨치)과는 여러 가지에서 다른 면모를 가졌다. 우선은 그규모가 대규모적이었다. 구빨치가 대개 열성적인 남로당원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던 반면에 신빨치는 남로당원 뿐만 아니라 북한 정규군 등이 합류하여 그 핵심세력이 확대되었다. 다음으로 그 임무가 뚜렷해졌다. 주전선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는 임무를 띠게 되었다. 비정규전인 제2전선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기도를 제외한 각도에 빨치산이 생겨났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전남의 빨치산은 전쟁 초기 조선노동당 전남 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이 빨치산의 사령관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신체적 한계 때문에 실제 유격대 총사령부는 김선우 부위원장이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빨치산들은 1951년 8월 제2차 6개 도당회의(전남북, 경남북, 충청남북)를 개최하여 이현상을 지도자로 하는 남부군(제5지구당)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빨치산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당시 전방에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을 토벌작전에동원하였다.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투사령부가 후방에 수립되었다. 백야사(백선엽야전전투사령부)는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탁월한 전투역량을 바탕으로 군경합동의 작전을 51년 11월부터 52년 3월까지 전개하였다. 당시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한 백야사는 이전의 토벌과는 달리 군경합동으로 한 겨울에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산에 있던 빨치산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에 맞아 죽게' 되었다. 백야사의 토벌작전은 빨치산의 역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핵심세력은 토벌을 피하면서 그 역량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그외 많은 역량의 손실을 가져왔다. 그 뒤에도 빨치산은 그 핵심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그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52년 7월에 다시 국군 제1사단을 동원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정부군의 지속적인 토벌과 산에서의 고립으로 빨치산 내부에서는 더 이상의 입산투쟁이 무력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반공체제가 강하게 구축된 현실에서 이들의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는 전향공작과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까지 계속되었던 빨치산의 역사는 1955년, 6년경에 산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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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민족사를 연상하던 세대도 이제는 많지 않다.  지금은 국립공원 제1호로 젊 은 남녀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지리산 --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가 얼룩졌던 시절의 얘기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30여년 전에 겪었던 일들은 이제 그들에겐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 할 얘기들 이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 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지난 은수를 다잡아 싣고 삭히며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 해 간다.

 여러해 전 어느 늦가을  나는 배암사골을 찾기 위해 반선부락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때마침 내린 가을비속 에서 나는 수많은 망령들의 호곡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 청년이 말했듯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젊은 넋들의 호곡소리를  나는 어둔 밤 골짝을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들은 것 같았다. 이튿날 깨어보니 지리연봉은 하얀 첫눈에 덮혀 있었다.

 

                                1988년 초여름  서울에서 [남부군]의 저자 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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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빨치산의 대명사....이현상(1905-1953)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등으로 빨치산부대 실록인 '남부군'을 쓴 이태  가 기록하고 있다.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하는 당시 서전사 2연대의 연대장 차일혁 총경의 아들 차길진은'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빨치산 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 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될 만큼 이현상은 빨치산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 북에서조차 외면당하면서 고립무원 속에 끝까지 버틴 외로운 빨치산 이현상........']

 

  이현상은 빨치산 제2병단장,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남한 내의 최고 빨치산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난 순천역에 나타나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끌고 간 뒤 53년 9월까지 햇수로는6년에 걸쳐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을 주도해왔다.그는 지리산 빗점골에서총탄을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화장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얽혀 있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가래가 있었고, 호주머니에서 염주가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있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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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지리산 과 빨치산

 

사실 자연의 형상으로서의 지리산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장엄한 명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민족사의 숱한 소용돌이 속에 위치했으며  또 민중의 고난과 한을 품고  호흡을 같이해온 지리산으로 볼때는 더이상 미적 신비감에만 싸여 있는 '순수한 산'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피의 전장'으로 변하는 비극적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의 군경토벌대와 좌익 빨치산들의 치열한 싸움일 것이다. 이 7년여 동안 지리산은 실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우성과 절규의 세계로 일변하였고 전쟁의 포화로 인해 처참한 모습으로 그슬려져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전쟁 당사자들이던 군경과 빨치산들 2만의 고귀한 생명들이 지리산의 이름모를 능선과 계곡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또 그 틈바구니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든 무고한 양민들이 불합리한 전쟁의 와중 속으로 편입될 것을 강요당하며 엄청난희생을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불과 40여 년 전의 비극적인 역사는 그동안 '뜨거운 감자'이었는지 금기시되고 유보돼왔던 측면이 강했다.

이제까지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문제의 올바른 정리와 최소한 몇몇 부분에서의 진상규명 자체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인데  아직은 재갈 물린 침묵의 지리산이 말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그이후 보다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틀속에서 규명되고  자리매김되어야 할것들이 일시 중단된 느낌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재검토되어야 할  민족사의 중요덩어리가 이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당대의 주역들이 점차 사라지고,지리산의 역사적 모습과 유적들이  여러 의도 속에서 붕괴일로에 있다는점에서 볼 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비경의 지리산이 자기 양면성 속에서 어떻게 피의 역사를 감당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많은 한계점이 지적될 줄 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지리산을 깊이 있게 인식하고  더 나아가 민족사의사각지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지리산에  빨치산이 완전히없어졌다고 당국에 의해 공식선포된 때는 1955년 5월 2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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